이름: 매튜 폭스
2005/10/25(화)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내가 하는 일은 기도가 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나오는 곳, 곧 중심인 가슴에서 나옵니다."

 

 

매튜 폭스

 

Creation Spirituality / Matthew Fox

 

 

나와 하느님의 관계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에서 태어나 여섯 명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나는 12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다시 걸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꿈은 축구를 하는 것이었지만 삶의 거의 모든 부분과 함께 그 꿈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죽음에 대해서 어른들 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그때 체험이 그랬습니다. 그 체험은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다시 걷게 되고 축구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때부터 감사의 마음이 내 영성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것은 다리를 갖고 있다는 놀라움, 또는 그밖에 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놀라움이나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놀라움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가톨릭 사제가 되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사제가 되려고 마음 먹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건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위스콘신의 아름다운 호수와 들판과 숲 속에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미사 특히 토요일 미사에서는 신부님들이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을 낭독하곤 했습니다. 지혜문학은 어머니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나의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나는 남자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통해 하느님의 여성성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1950년대의 문화적 흐름과도 어울리는 일이었습니다.

음악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토벤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 들었는데, 그의 음악은 내 영혼을 약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 작품, 특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의 기도 체험은 신비롭기도 하고 예언자적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신비로운 측면이고, 공정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의 고난에 의지하여 똑바로 선다는 것이 예언자적인 측면입니다. 나의 영성과 하느님 체험은 이렇게 신비로운 측면의 기쁨과 예언자적인 측면의 투쟁이 결합하여 변증법적으로 창조됩니다.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많습니다. 나는 특히 그 중에서 내가 "창조적인 영성으로 나아가는 네가지 길"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통해 신성을 체험합니다.

첫 번째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은총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13세기에 활동한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길을 ’현존(is-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풀잎 하나를 뜯어 들고 그 색깔과 모양과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20억년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예술가라면 풀잎 하나를 그리면서 그 속에 담긴 신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면서, 강아지를 보면서, 또는 친구를 보면서 경외심에 사로 잡힐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스럽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 속에 깃들이어 있으며, 그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만물 안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식입니다. 만물 속에 현존하는 신성을 체험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입니다. 이것은 어두움, 비움, 무(無), 공(空)을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자신이 고통 속에 있을 때 또는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이 듭니다. 그럴 때 이 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를 낮추고 가라 앉아야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까지 가라 앉아야 끝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끝까지 낮추었던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앉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적인 체험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강한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어둠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의 계시입니다. 어둠은 궁극적으로 신성의 침묵입니다. 그 침묵을 통해 하느님과의 결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창조의 길(Via Creativa)’입니다. 이 길은 폭발을 통해 가는 길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이 길을 표현하기 위해 ’돌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어둠의 밑바닥에서 탈출하여 또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빛으로 나오는 체험입니다. 수난(부정을 통한 길)을 체험한 예수께서는 부활(창조를 통한 길)의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가 굴려지고 무덤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는 가라 앉는 과정에서 껍질을 벗고 자기를 비웁니다.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 번째 길, 곧 창조를 통해 신성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나는 작가로서 글쓰는 작업을 할 때, 내가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영의 도구로써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자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다른 예술가들도 아마 비슷한 체험을 할 것입니다. 나를 통해 진실된 그 무엇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내가 ’부정의 길’을 통해 자신을 비웠기 때문에, 외적인 사물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조의 길’을 통해 거대한 신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의 어떤 차원에 창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창조의 동역자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우리는 당신과 함께 창조해 나갑니다. 당신은 창조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변형의 길(Via Transformativa)’입니다. 이것은 창조성과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사회를 향해 발산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평화의 복음을 함께 나누는 예언자가 가는 길이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대의 명상의 열매를 나누라"는 말로 표현한 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명상의 열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상태의 사회제도나 문화에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투쟁의 길이고, 자비의 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 새 생명을 누립니다. 하느님은 이 길은 가는 사람을 모든 것에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풀잎의 순진무구함을 볼 수 있는 어린 아이처럼 만들어 줍니다.

이 길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구조를 바로 잡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활동이나 니카라구아의 혁명 같은 것이 창조의 길을 사회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이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를 읽습니까? 당신은 어떤 음악에 감동을 받습니까? 어떤 사회 문제가 당신의 열정을 불러 일으킵니까? 당신은 어떤 일을 가장 좋아합니까? 에크하르트는 "참된 일을 할 때 황홀해진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황홀해집니까? 언제 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까? 무엇에서 기쁨을 느낍니까? 당신은 어둠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아무 것도 없음’을 느껴 보셨나요? 어둠의 하느님에 대한 느낌은 어떻든가요?

나는 여러분의 체험을 존중합니다. 환경의 영향으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의 어릴적 경험이 하느님이나 세상에 대한 체험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 보라고 권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10살 때, 20살 때, 30살 때 당신이 생각한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 보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서, 그 세 가지 체험 사이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8살 때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성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숙할 가능성이 있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는 말로만이 아니라 이미지 차원에서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인간 중심적인 말이 아닌가 해서이지죠. "인격적"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을 우리처럼 두 발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상상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위험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말도 해야 하지만 듣기도 해야 합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하느님 체험이 아인쉬타인이 체험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 잡혔으며, 우주가 우리의 집이며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 보다는,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는 신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인격적인 우주"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발 가진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온 우주 만물이 포합됩니다. 우리는 만물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인격적"이라는 말에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 사람인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 위험은 내가 좋아하는가만으로 친구를 결정하는 청소년기의 특성에 고착되어 있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관념이 종교에까지 투사되어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성숙한 어른이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우주 속에서 기쁘게 뛰노는 우주의 시민입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 인격적인 우주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을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주는 친구나 동료 정도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내가 하는 일은 기도가 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나오는 곳, 곧 중심인 가슴에서 나옵니다. 모든 일이 가슴의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일은 가슴에서 나와서 가슴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도록 하는 노력이 진정한 일입니다. 이런 일 속에는 음악도 포함되고 건전한 종교도 포함되고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파는 모든 행위까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일은 어른들이 자신이 받은 은총을 다음 세대로 물려 주는 길입니다. 일은 관계입니다. 나는 친구와의 우정이나 이성간의 사랑이나 일반 사회에서의 대인관계 같은 모든 인간 관계가 중심인 가슴에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중심과 만날 수 있을까요? 앞서 얘기한 네 길 중에서 첫 번째 길과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 특히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이 만나는 지점을 통해 중심과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어둠 속에 침잠하는 ’부정의 길’과 빛의 세계로 다시 나오는 ’창조의 길’ 사이에는 고요한 정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중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요한 정지 속으로 빛과 은총이 놵아져 들어오고, 우리는 그 빛과 은총을 우리의 관계를 향해 발산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드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내가 드렸던 어떤 기도 보다도 근본적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수천 년 동안 이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일을 끝낼 때는 언제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아 호 미타키 외친’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와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게"라는 뜻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늘 자기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대지, 바위. 새, 나무, 구름, 모든 종족과 모든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들과 영들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문화에 길들어 있는 우리는 "관계"라는 말을 가족이나 친척 또는 다른 두 발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적인 전통에서는 우리는 하나의 자궁에서 태어났으며, 우리의 관계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자궁은 우주적인 하느님의 자궁입니다.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편안한 안식처이며, 어둡고 비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궁의 어둠과 비어 있음을 체험한 사람은 다시 창조적인 빛의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인격적인 우주를 체험하려면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만 관계를 맺으려는 청소년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며 끊임없이 은총을 베풀고 있다고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믿으십시오.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를 무아의식(unself-consciousness)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에고를 넘어선 그런 의식에 도달하십시오. 자기를 잊고 기뻐하며 즐겁게 뛰노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여행에서 그리고 이 우주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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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폭스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있는 홀리 네임스 대학(Holy Names College)에 ’문화와 창조적인 영성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연구소에서는 새로운 우주관을 도출하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거기에는 물리학자,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적인 지도자, 신학자, 사회 사업가, 성서 신학자, 여권 주장자, 심리학자, 수피 무용가,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폭스는 문화와 영성에 관련된 책을 열 두 권 펴냈다. 그 중에 <최초의 축복(Original Blessing)>, <빙겐의 힐데가르트의 깨달음(Illuminations of Hildegard of Bingen)>,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강림(The Coming of the Cosmic Christ)> 등이 최근에 나온 책이다. 그는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영성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성공회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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